와인 산업은 오래된 산업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고대부터 와인을 즐겨 마셨고,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방법을 발전시켜왔죠. 오늘날, 수많은 메이커가 다양한 와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소비자는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와인을 선택해야 하는데요. 각기 다른 특징의 와인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소비자는 몇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와인을 골랐습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정보를 활용할 수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빈티지(Vintage)’는 와인이 원료인 포도를 수확한 해를 의미합니다. 좋은 와인의 경우 병의 라벨에 빈티지가 꼭 표기되고, 소비자는 이를 확인해 와인의 품질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떼루아(Terroir)’는 토양, 기후 등 우수한 와인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조건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떤 해에는 일조량이 풍부하지만, 어떤 해에는 부족해 포도의 향과 당도가 달라질 수 있는데요. 때문에 빈티지는 와인 애호가들이 와인을 고를 때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와인 고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빈티지 차트를 외우고 다니지도 않죠. 그런데도 와인 생산자는 높은 빈티지 평가를 매년 고민합니다. 더 많은 지역의 포도가 매년 높은 품질로 재배되고, 구매에 필요한 정보 역시 수월하게 제공된다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텐데요. 그리하여 와인 산업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적극 도입하고 있습니다.
홀리오 팔마즈(Julio Palmaz)는 풍선확장형 스텐트의 발명가입니다. 존슨앤존슨과의 계약으로 확보된 그의 경제력은 와인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고, 팔마즈는 ‘팔마즈 비니어즈(Palmaz Vineyards)’라는 가족 소유의 와인 양조장을 설립합니다. 이후 경영학을 전공하고, 컴퓨터 과학을 공부한 홀리오의 아들 크리스티안 팔마즈(Christian Palmaz)가 팔마즈 비니어즈에 참여하면서 와인 양조는 시작부터 끝까지 AI를 거치는 기술의 산물이 됐습니다.
적외선 카메라 및 멀티 스펙트럼 카메라는 일주일에 두 번씩 포도밭의 이미지를 수집해 엽록소를 분석합니다. 이 정보는 수분 공급 시스템에 적절한 데이터를 입력하는 데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중성자수분측정기로 포도나무 주변의 수분 함량을 측정하고, 적외선 센서가 병해충 피해를 사전에 감지합니다. 안정적 포도 수확이 이뤄지면 FILICS(Fermentation Intelligence Logic Control System)이라고 불리는 머신러닝 모델로 분자 수준부터 발효 과정의 모든 세부 사항을 추적합니다. 발효되는 35일은 동안 당분과 알코올 농도 변화를 초음파 측정법으로 초당 10회 측정해 자세한 데이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크리스티안은 “시간당 1GB의 데이터가 생성되는데 이를 수년 동안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숙성을 위해 통에 담는 것입니다. 최상의 와인을 위한 통계학 기반 분석법으로 통의 나무, 기법, 표면 두께, 화합물 데이터를 활용해 수천 개의 통 중 최적의 통을 찾아냅니다. AI 알고리즘이 데이터로 포도를 기르고, 숙성할 보금자리까지 결정하는 역할을 도맡는 셈이죠.
크리스티안은 역사적으로 운명에 맡겼던 와인 제조가 기술을 더하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포도의 완벽한 재배만이 최고의 와인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기대하지만, 그렇게 직관적인 것 만도 아니다”라면서 “때로는 적합한 통과 결합했을 때 최고의 와인을 만들 수 있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매년 변하는 기후 영향에도 포도가 잘 자랄 수 있게 하고, 재배한 포도의 품질 및 특성에 따라 가장 적합한 통을 찾는 것, 그것이 실패 없이 매년 환상적인 와인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얘기입니다.
팔마즈 비니어즈는 기술 도입으로 에이커당 20%의 물을 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똑똑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와인을 생산하고 있죠. 일부 전통적인 방법으로 와인을 제조하는 사람들은 팔마즈 비니어즈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와인은 기다림의 산물이고, 기다림에서 나타난 기대감이 와인 한 병에 고스란히 담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3,000억 달러 규모의 와인 산업에 기술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막는 원인이 됐습니다. 팔마즈 비니어즈처럼 개인이 직접 기술을 도입하는 게 아니라면 한계가 있었죠. 그러나 이런 고전적이었던 분위기도 점차 변하고 있습니다.
AI 로봇 스타트업인 바인스카우트(VineScout)는 포도밭을 위한 AI 로봇을 개발했습니다. 최신 버전의 로봇 VS-3는 자율 주행으로 포도밭 사이를 이동하면서 각종 센서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로봇은 최소 2일 동안 작동할 수 있습니다. 시간당 약 1만 2000개 포인트 기록하며, 각 포인트에서 30개의 주요 데이터를 확보합니다. 사람이 나무를 관찰하면 일반적으로 시간당 40개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으니 로봇의 용이성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야간에도 작업을 이어갈 수 있죠. 적외선 센서와 멀티 스펙트럼 카메라로 잎의 온도와 포도나무에 포함된 물의 양을 측정합니다. 이로써 포도나무가 물이 필요한지, 얼마나 성숙했고, 건강한 상태인지, 농부는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인스카우트의 포도밭 로봇은 유럽 위원회의 지원으로 지난 5년 동안 연구됐습니다. 오랫동안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한 와인 산업을 현대화하기 위한 투자로 3년 안에 본격적인 도입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효용성만 입증되면 여러 지역의 포도밭에 빠르게 확산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로봇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와인은 어떻게 소비될까요?
비비노(Vivino)는 세계 최대 온라인 와인 판매 플랫폼입니다. 5천100만 명이 이용자가 와인 취향에 대한 데이터를 생성하고 있죠. 회사는 빅데이터와 AI 기술로 소비자가 원하는 와인을 추천해주는 개인화한 디지털 소믈리에를 도입했습니다.
비비노에 따르면, 모든 와인 추천은 100% 커뮤니티 내 사람들이 남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합니다. 맛이 부드러운지, 식사와 잘 어울리는지, 어떤 식사와 어울리는지 실제 마셔본 경험을 기록한 평가와 등급이 핵심 데이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평가는 프로필에 추가돼 이용자의 취향과 선호도에도 반영됩니다. 평가를 늘릴수록 자신에게 더 적합한 와인을 발견할 기회도 증가하는 것이죠.
매일 2만 명의 신규 이용자가 비비노 앱을 내려 받는다고 합니다. 데이터베이스에는 15억 장의 와인 라벨 사진, 2억 개의 등급, 1,000만 개의 와인이 저장돼 있습니다. 비비노는 이런 데이터 위에 소비자가 최소 5개의 와인만 평가하면 이후부터 매치 스코어를 부여하는 AI 알고리즘을 구축했습니다.
비비노의 CEO 하이니 자차리아센(Heini Zachariassen)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진정한 판도를 바꾼 건 거의 모든 와인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라면서 “데이터는 우리 사업의 핵심이고, 5,000만 명의 이용자가 데이터 유지보수를 돕기 때문에 다른 어떤 회사도 우리와 경쟁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계속해 그는 “나조차 AI의 추천에 놀란다. 나는 샴페인을 좋아하는데, 여태 품종을 신경 쓰지 않았으나 비비노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하는 샴페인이 모두 샤르도네라는 걸 알려줬다”고 덧붙였습니다.
지난 2월, 로봇 스타트업 와인캡(WineCab)은 로봇과 AI 기술을 결합한 와인 저장고 ‘와인월(WineWall)’을 공개했습니다. 와인월은 최대 600병의 와인을 저장할 수 있으며, 저장하는 와인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함께 제공합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7축 로봇 팔은 3개의 보조 카메라를 통해 와인을 보관, 스캔, 제공하는 능력을 갖췄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필요할 때마다 와인을 구매해서 마시겠지만, 와인 선물이 잦거나 여행 갔을 때 꼭 와인을 구매해서 오는 등 취향과 관계없이 많은 양의 와인을 보관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많은 와인 중 적합한 와인을 찾는 것은 마트에서 와인 코너 앞에 선 것과 다르지 않죠. 와인캡은 와인월 소유주가 글로벌 와인 전문가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수집한 와인 중 취향에 맞는 것이 있으면 와인월이 기억해 비슷한 와인을 추천하거나 앱에서 컨설팅을 요구할 수 있고, 재입고 기능도 제공합니다. 심지어 안면 인식 장치로 소유주만 이 와인만을 위한 로봇에 접근할 수 있죠.
와인월은 모델에 따라서 17만 9,000달러부터 24만 9,900달러의 가격에 판매됩니다. 다소 고가의 제품이지만, 많은 와인 애호가가 기다릴 만큼 반응이 뜨겁습니다. 그래서 나무, 금속, 내벽 등 다양한 마무리 옵션을 제공해 소유주의 인테리어에 적합한 외형을 주문 제작하는 서비스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외형까지 고유성을 갖춘 나만의 와인 창고이자 소믈리에인 셈입니다.
이처럼 마냥 고전적일 것만 같은 와인 시장도 기술의 흐름을 따르는 추세로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주류 시장도 다양성이 중요해지면서 와인 산업도 파격적인 시도가 필요한 때라는 의견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시도에 불과한 몇 가지 사례만이 와인 산업을 기술 문턱에 올려놓고 있지만, 그 어떤 주류보다 많은 데이터를 가진 와인이기에 앞으로 기술 도입 성과가 기대됩니다.
글 l 맥갤러리 l IT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