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양한 형태의 스마트 커넥티드 디바이스가 보급되고 있습니다. 이를 활용해 더욱 편리한 생활 환경을 구축하는 것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그러나 ‘스마트홈’은 그 용어가 등장한 이래로 20여 년간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다양한 스마트 기기들을 연결한 후 통합 제어 장치를 이용해서 이들의 상태를 확인 및 제어하거나 기본적인 자동화 동작을 구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죠.
하지만 지능형 사물인터넷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단순 제어 중심의 스마트홈이 지능형 스마트홈으로 변하고 있는데요. 다양한 생활 서비스와 결합해 비즈니스 패러다임을 디바이스에서 서비스 중심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상호 배타적이었던 기존 스마트홈의 한계
국내의 경우 현재 스마트홈 생태계는 통신사, 가전 제조사, 건설사가 주도하고 있지만, 미국의 경우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스마트홈 액세서리라 불리는 다양한 소형 스마트홈 장치를 만드는 디바이스 제조사, 이케아나 한샘 같은 가구 및 인테리어 사업자, 그리고 출동 보안, 홈케어 등의 생활 서비스 사업자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스마트홈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다양한 사업자들이 독자적인 방식으로 스마트홈 서비스 환경을 구축하다 보니 사용자들이 스마트홈 환경을 이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다양한 제조사의 디바이스를 이용해 스마트홈 환경을 구축하려는 소비자들은 먼저 스마트폰에 디바이스 제조사의 개수만큼 앱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디바이스 제조사별로 제각각인 디바이스 설정 방법에 따라 디바이스를 등록해야 하죠. 실제로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어 디바이스 이용을 포기하거나 반품하는 비율이 무려 20%를 넘어설 정도입니다.
스마트 가전제품을 구매해 놓고 그것이 스마트 디바이스인지 모르는 이용자도 70~80%에 달합니다. 또한, 특정한 스마트홈 플랫폼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디바이스가 해당 플랫폼을 지원하는지 확인해야 하는데요. 만약 지원한다면 개별 디바이스 플랫폼과 스마트홈 플랫폼을 일일이 연동시켜줘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쳐야만 사용자들은 비로소 스마트홈을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디바이스 제조사들의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이들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마트 디바이스와 스마트폰용 앱을 개발하고, 이들을 이용하기 위한 서비스 플랫폼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다음 해야 할 일은 디바이스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서비스 플랫폼과 연동시키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중소 디바이스 제조사들이 주요 스마트홈 사업자의 플랫폼에 연동하게 되는데요. 연동해야 하는 플랫폼의 개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 큰 비용이 발생해 수익성이 악화됩니다.
반면, 주요 스마트홈 사업자들은 경쟁 관계 때문에 자신들의 플랫폼을 경쟁사의 플랫폼에 연동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LG전자 스마트홈 앱에서 삼성전자 제품을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매터 표준, 플랫폼의 경계를 뛰어넘다
스마트홈과 관련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스마트홈 표준이 개발됐습니다. 2010년대 중반에 개발된 AllSeen Alliance, Open Interconnect, Thread Group의 표준 이후 Open Interconnect 주도로 만들어진 OCF(Open Connectivity Foundation)의 표준이 대표적인데요. 기업들의 관심만큼 수용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매터(Matter)라고 하는 새로운 스마트홈 연동 표준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매터는 2019년 말 당시 직비 얼라이언스(Zigbee Alliance)였던 CSA(Connectivity Standards Alliance)의 주도로 아마존, 애플, 구글 등의 플랫폼 사업자들에 의해 추진된 ‘CHIP(Connected Home over IP)’이라는 프로젝트가 2021년 5월에 사실상의 스마트홈 표준으로 개명된 것을 말합니다.
매터 표준은 IP 프로토콜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등 기존의 OCF와 여러 면에서 닮았습니다. 하지만, ‘로컬 제어(Local Control)’를 기반으로 하나의 디바이스를 동시에 여러 플랫폼에 등록해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멀티 어드민(Multi-Admin)’이라는 특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기존의 OCF에서는 클라우드에 존재하는 스마트홈 사업자들의 플랫폼에서 모든 디바이스 및 이들 사이의 동작이나 다른 플랫폼과의 연동을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매터 환경에서는 집안의 로컬 컨트롤러가 클라우드에 있는 플랫폼과 함께 이 역할을 대신합니다. 즉, 로컬 컨트롤러가 디바이스의 등록 및 관리, 그리고 이들 사이의 동작을 관할하게 되는 것이죠.
만약, 2개 이상의 플랫폼을 동시에 이용하고자 한다면, 사용자들은 그만큼의 로컬 컨트롤러를 설치한 후 이미 다른 컨트롤러에 등록했던 디바이스들을 등록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동시에 2개 이상의 플랫폼을 이용해서 스마트홈 디바이스들을 제어하거나 이용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를 위해 매터는 IP 프로토콜(IPv6)을 이용합니다. 특정한 플랫폼에서만 고유했던 디바이스 주소를 이용하는 대신 글로벌하게 고유한 주소 체계를 이용하는 것인데요. 따라서, 매터를 위한 기본 통신 프로토콜은 IP를 지원하는 와이파이와 스레드(Thread)를 기본으로 하며 향후 이더넷 등 다른 IP 기반의 통신 프로토콜도 수용할 예정입니다.
동일한 IP 주소를 갖는 디바이스가 여러 스마트홈 플랫폼에 동시에 등록돼 관리되기 때문에, A 플랫폼에서 디바이스를 제어하게 되면 그 디바이스의 상태 변화가 A 플랫폼은 물론 B 플랫폼에도 실시간으로 반영됩니다.
첫 번째 매터 표준은 2022년 10월에 발표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이와 동시에 매터 표준에 맞춰 개발되고 있는 50개 기업의 130여 제품이 인증과 함께 출시될 예정인데요. 기존 출시된 수많은 디바이스도 매터 표준을 지원하도록 펌웨어를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스마트홈 생태계가 당장 매터 중심으로 전환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매터 표준 1.0은 스마트 램프, 스위치, 플러그, 블라인드, 커튼, 온도조절기, 에어컨, TV, 도어락 등 10여 종의 디바이스 유형만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로봇청소기를 비롯한 기타 가전제품 및 스마트 에너지 관리 장치, 보안 카메라 등에 대해서는 이후 버전에서 지원할 예정입니다.
초보자도 이용할 수 있는 스마트홈
매터 표준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간편한 디바이스 등록(provisioning)과 설정입니다. 그동안은 디바이스를 자신이 사용하려는 스마트홈 플랫폼에 등록해서 이용하기 위해선 디바이스 제조사별로 상이하고 복잡한 절차를 따라야만 했는데요. 매터 환경에서는 스마트홈 플랫폼 앱에서 제품에 부착된 QR 코드를 촬영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등록됩니다.
이외에도 허브 역할을 하는 장치가 이미 설치돼 있다면 그 장치와 블루투스를 통해 자동으로 스마트홈 플랫폼에 연결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누구나 스마트홈 디바이스 및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기술들은 매터 표준을 위해 새로 개발된 것은 아닙니다. 아마존의 Frustration-Free Setup이나 구글의 Fast Pair처럼 기존에 아마존이나 구글, 애플과 같은 기업이 자신의 스마트홈 플랫폼에서 사용하던 디바이스 등록 방법을 매터를 지원하는 디바이스 제조사들을 위해 공개한 것입니다.
디바이스 경쟁에서 서비스 경쟁으로
매터 표준을 주관하는 CSA의 참여 기업은 무려 500개가 넘습니다. 이 중에서 표준의 진화 방향이나 주요 스펙을 결정하는 이사회 멤버는 모두 28개 기업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중 9개가 서비스 및 플랫폼 관련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IT 관련 표준의 이사회 멤버들은 대부분 디바이스 제조사나 칩 제조사들입니다. 그러나, 매터의 경우 아마존, 애플, 구글을 비롯해 스마트싱스, 컴캐스트, 이케아, 크로거, ADT 등 서비스 및 플랫폼 사업자들이 표준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집과 관련된 서비스 및 플랫폼 사업자가 주도적이라는 것은 앞으로의 스마트홈 생태계는 디바이스 사업자나 시스템 통합 사업자가 아닌 서비스 사업자에 의해 주도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스마트홈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서비스 사업자가 관련 시장을 주도하지는 않을 겁니다. 매터 표준으로 인해 스마트홈 이용 환경이 개선됨에 따라 스마트 디바이스 제조사들이 먼저 기회를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매터만 지원하면 어떤 디바이스라도 매터를 지원하는 플랫폼에 등록해서 이용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경쟁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사실상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경쟁 디바이스에 비해 차별화할 수 있는 부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결국 가격 경쟁으로 이어져 디바이스 제조사들의 수익성은 악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상황은 스마트홈 플랫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은 더 많은 디바이스가 연동되는 플랫폼이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었지만, 매터 표준 이후에는 모든 플랫폼이 비슷한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동안 자신들의 서비스 생태계에 더 많은 디바이스를 포함하기 위해 노력했던 플랫폼 사업자들은 이들을 기반으로 하는 지능형 자동화 서비스나 디바이스의 서비스화 혹은 디바이스와 기존 서비스를 결합하는 방향으로 사업 구조를 빠르게 전환하리라 예상됩니다. 실제로, 아마존과 구글은 이 분야에 있어 앞서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 세대에 설치돼 사용되는 로컬 컨트롤러 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스레드 통신 기반의 장치들을 연결하는 허브 장치로도 이용되며 동시에 음성인식 기반의 사용자 인증 및 인터페이스 장치로도 이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로컬 컨트롤러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치에는 인공지능 스피커나 스마트 디스플레이, 셋톱박스, 스마트 온도조절기 등이 있습니다. 문제는 해외 선도 기업들과 달리 국내 기업들은 아직 매터 표준을 지원할 수 있는 컨트롤러나 홈 허브 장치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장치들은 장기적으로는 음성, 안면 인식을 통한 사용자 인증은 물론 음성, 영상 기반의 인터페이스 제공, 사용자 관련 정보의 저장, 분석, 활용 등 그동안 클라우드에서 제공되던 일들을 로컬하게 제공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들의 성능을 개선하고 사용자 맞춤형 지능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연합 학습(Federated Learning)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즉, 개별 장치에 저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공지능 모델을 강화한 후 이 모델을 클라우드에 모아 더 정교하게 만들어 분산된 장치에 재배포하는 방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 데이터는 로컬하게 수집되고 저장되며, 개인 디바이스에서 처리된 학습 엔진만이 클라우드로 전송됩니다. 따라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 향상된 지능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글 ㅣ LG CNS 정보기술연구소 기술전략팀 ㅣ IoT 전략연구소 김학용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