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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영국의 작가 클라이브 기포드(Clive Gifford)가 IT와 관련된 역사 속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시대를 앞서 나간 영국의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가전제품과 디지털 기기가 발명되기 한참 전에 다양한 계산과 업무수행이 가능한 다목적 기계를 처음 생각해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찰스 베비지의 생애와 시대상
찰스 배비지는 1791년 12월 26일에 부유한 영국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늘 허약했던 그는 여덟 살의 나이에 생명을 위협하는 고열로 고생을 하기도 했는데요.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1810년까지 주로 가정교사와 함께 집에서 공부했습니다. 어릴 때 혼자 대수학을 깨우칠 정도로 수학에 관심이 많아 캠브리지 대학에서 더 깊이 공부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수학자로 인정받아 25세에 영국학사원회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828년에는 아이작 뉴턴과 스티븐 호킹이 역임한 것으로 유명한 캠브리지 루카스 석좌교수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캠브리지에 있는 동안 배비지는 그곳에서 공부하던 (그리고 이후에 천문학자이자 광화학자가 된) 존 허셸(John Hershcel)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1820년에 이 두 사람은 다른 학생들과 힘을 모아 해석학회(Analytical Society)를 창립하기도 했습니다. 배비지가 컴퓨터와 관련하여 선구적인 연구를 하게 된 것은 허셸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신뢰할 수 있는 계산용 기계는 주판뿐이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산업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갓프리드 라이프니츠(Gottfried Liebnitz)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심플한 기계식 계산기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좀 더 복잡한 계산을 위한 것으로는 다량의 수표(數表)가 사용되곤 했습니다. 이 수표는 ‘컴퓨터’라고 불리던 일꾼들이 수십 명씩 모여 수작업으로 만든 것으로, 엔지니어링과 과학 그리고 운항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쇄된 수표를 사용하여 계산을 하는 것은 몹시 느렸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지치는 일이기도 했는데, 이는 수표에 종종 오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비지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디오니시우스 라드너(Dionysius Lardner)가 40권의 수표를 조사한 결과 3,700개의 오류가 발견되었고, 발견하지 못한 오류 역시 상당량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배비지는 당시 열정적인 수표 수집가였습니다. 1939년에 그는 수년 전 존 허셸이 가져다 준 한 권의 수표책이 본인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허셸 씨가 컴퓨터들이 한 계산을 가져왔고, 우리는 그 계산을 검증하는 지루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곧 여러 개의 오류가 발견되었고, 오류가 너무나 많아 “이 계산을 할 기계가 있었으면!”이라고 내뱉을 정도였습니다.
배비지는 복잡한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새로운 기계를 만드는 일에 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계가 현재를 사는 우리로서는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당시 대부분의 기술은 초창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증기여객열차가 여전히 운행되고 있었고, 일상생활에서 사진을 찍지도 않았으며,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가 1829년대에 발명한 전기모터와 발전기를 포함한 전기관련 기계 역시 여전히 과학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찰스 배비지가 고안한 미분기(Difference Engine)
정확한 수표를 만들어내는 기계를 만들겠다는 배비지의 기획서를 영국정부가 채택했습니다. 영국정부는 또한 여기에 1,700파운드(한화 약 30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1833 년까지 이 보조금을 17,500파운드(한화 약 300만원)까지 늘리기로 했습니다.
이 금액은 현재 시세로 계산하면 총 수백만파운드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게다가 배비지의 아버지가 1827년에 사망하면서 100,000파운드 (한화 약 1억 7천만원)에 달하는 유산을 남겨주었는데, 그는 이 유산의 대부분 역시 이 계산용 기계에 투자하였습니다.
그의 첫 미분기(Difference Engine) 디자인이 완성되었다면 당시로서는 가장 복잡한 기계가 탄생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디자인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이 미분기는 2.4미터 높이에 10톤 이상의 무게를 자랑하며, 또한 계산과 출력 사이에 인적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전용 자동프린터 역시 탑재하고 있습니다.
이 미분기는 직립축이 길게 이어져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직립축에는 톱니가 달린 황동 기어바퀴가 있습니다. 계산되는 숫자 한자리마다 하나의 바퀴가 주어지고 계산 메커니즘은 유한 차분법을 따름으로써 복잡한 계산 역시 다량의 상이한 덧셈의 합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배비지의 계획은 비범한 것이었으나 25,000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엔진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정확성이 필요했습니다. 당시에는 전기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계는 수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계가 무리 없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찰력이 정밀하게 조절되어야 했지만, 이를 완벽히 소화해낼 수 있는 엔지니어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수년이 지나면서 비용은 쌓여가고 갈등도 점차 심각해졌습니다. 수천 개의 부품을 만들었다가 다시 재활용 쓰레기로 녹여버리곤 했습니다. 배비지는 이후 크기가 더 작고 적은 수의 부품을 요하는 미분기 2호를 디자인했지만, 1830년대 중반이 되자 그의 관심은 더욱 야심찬 목표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배비지의 혁명적인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
배비지의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습니다. 이 기기는 곱셈과 나눗셈뿐만 아니라 덧셈과 뺄셈까지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가능한 모든 계산이 가능하도록 프로그램을 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해석기관은 엔진용 프로그램과 서브루틴을 만들기 위해 데이터와 명령을 분리하는 방식을 사용했고, 베틀에서 사용되는 펀치카드도 응용했습니다.
이 기기는 또한 그래프, 인쇄된 자료뿐만 아니라 연판(stereo type, 숫자로 만들어진 표를 새겨 이후 인쇄기용 틀로 사용될 수 있도록 연질재료로 만든 트레이) 등 다양한 출력 옵션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해석기관의 작동에 있어 중점적인 부분은 ‘스토어(Store)’라고 불리는 메모리인데, 이 메모리에 숫자와 계산의 중간 결과가 보관됩니다. 배비지는 스토어가 1,000개의 50자리 숫자를 보관할 수 있도록 하고, 출력물이자 기계에 다시 사용될 수 있는 펀치카드를 이용해 확장 역시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스토어는 엔진의 ‘밀(Mill)’과 분리되어 있는데, 밀은 전자 컴퓨터의 중앙 처리 유닛과 비슷한 연산처리를 수행합니다. 배비지의 기기는 분기(branching), 루핑(looping) 그리고 병렬처리와 같이 오늘날 디지털 기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고급 기능들 역시 탑재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기기는 오늘날의 디지털 컴퓨터와 매우 유사한 부품, 기능 그리고 업무의 분류방식 등을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배비지 이전에는 절대 볼 수 없던 것이었죠.
그는 해석기관에 대해 상세한 설계와 관련내용을 구성하였지만, 이 기계를 물리적으로 구현할 수 없었습니다. 1871년에 사망하기 전, 그는 “다음 세상이 판단할 것이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사후에도 계속 개발되는 배비지의 시도들
배비지의 아들인 헨리 프로보스트 배비지(Henry Provost Babbage)가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받았고, 이후 영국 및 미국정부를 위해 스웨덴의 인쇄업자 조지 슈츠(George Scheutz)가 배비지의 미분기에 기반하여 만든 엔진이 수표 및 천문표 제작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의 다목적용 계산 및 컴퓨팅 엔진은 1940년대부터 시작된 전자 컴퓨팅이 도래하기 전까지 완성될 수 없었습니다.
전자 컴퓨팅이 등장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인 1991년,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배비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디자인으로 미분기 2호를 만들었습니다. 작업팀이 거의 6년간 열심히 노력한 끝에, 4,000개의 부품과 함께 그 무게가 LG G4 스마트폰의 19,700배에 달하는 3,000kg짜리 기계가 탄생했습니다.
기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배비지의 이론이 옳았음을 증명하였고, 과학박물관은 곧이어 배비지가 미분기와 함께 사용하도록 한 프린터도 제작하였습니다. 프린터 역시 4,000개의 부품을 필요로 하며 그 무게가 2,500kg에 달했습니다.
두 번째 미분기는 마이크로소프트 전 부회장인 네이선 미어볼드(Nathan Myhrvold)를 위해 2008년에 구축되었습니다. 배비지 디자인을 실제로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배비지의 플랜 수에서 이름을 딴 자선단체 플랜 28(Plan 28)이 그의 해석기관을 만들기 위해 3차원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착수했기 때문입니다.
기금이 충분히 모이기만 한다면 실물 크기로 정상 작동도 가능한 해석 기관을 배비지 탄생 250주기인 2021년까지 구축할 예정입니다. 플랜 28의 창립자이자 영국 프로그래머인 존 그래엄-커밍(John Graham-Cumming)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를 고안한 그의 기념비적인 기기를 작동 가능하게 구축하고, 현재를 사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에게 세기를 앞서가는 꿈을 가지도록 영감을 주고자 한다.”
[‘A Smart, Creative World: Past and Future’ 연재 현황]
(1) 컴퓨터의 탄생, 시대를 앞서간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http://blog.lgcns.com/950
(2)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http://blog.lgcns.com/982
(3) ENIAC: 세계 최초의 빠른 컴퓨터
http://blog.lgcns.com/1001
(4) 디버깅의 신화,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
http://blog.lgcns.com/1021
(5) 초기 컴퓨터의 진화
http://blog.lgcns.com/1042
(6) 컴퓨팅의 미래를 보여준 더글러스 엥겔바트
http://blog.lgcns.com/1060
(7) 웹의 발명: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http://blog.lgcns.com/1165
(8) 인터넷의 탄생
http://blog.lgcns.com/1171
(9) 위키의 탄생
http://blog.lgcns.com/1175
(10) 로봇의 발전
http://blog.lgcns.com/1182
글 ㅣ클라이브 기포드 (Clive Gifford)
■ 웹링크: 더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으시면
♦ http://www.computerhistory.org/babbage/howitworks/
배비지의가 어떻게 유한차분법을 미분기에 응용하였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해석기관을 구축하고 있는 단체의 사이트
♦ http://history-computer.com/Babbage/AnalyticalEngine.html
해석기관에 대한 깊이 있는 기사
■ 덧붙여: 찰스 배비지에 대해 알지 못했던 네 가지
- 초기 철도에 매료되었던 배비지는 1838년에 배장기를 발명하였으며, 이는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배장기 중 하나였다. 이 기기는 열차 기관차 앞에 부착되어 전방의 장애물을 치우는 역할을 했다.
- 1847년에 배비지는 인간의 눈에 대한 의학적 연구를 위해 갑작스레 세계 최초의 검안경을 만들었다.
- 배비지는 유명한 암호학자였다. 그는 크림전쟁 중 적이 알 수 없도록 만들어진 군사용 메시지인 비즈네르 암호(Vigenère ) 등 여러 개의 코드와 암호를 풀었다. 배비지의 작업은 군사 기밀로 부쳐져 이에 대한 공로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
- 배비지의 뇌는 둘로 나뉘어 런던에 보관되어 있다. 절반은 켄싱턴(Kensington)의 과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나머지 절반은 링컨스인 왕립 외과대학에 있는 헌터리안(Hunterian) 박물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