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는 이동하는 기계에서 점점 개인화한 공간으로 발전해왔으며, 많은 전문가가 자동차를 스마트폰의 다음으로 예상합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아닌 개인화한 디지털 공간이 이동하는 형태가 될 거라는 거죠. 하지만 스마트폰과 달리 넓은 공간을 개인 또는 용도에 맞게끔 디자인하고, 대량 생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날, 자동차는 내연기관과 화석연료 대신 전기 모터와 배터리로 움직이는 전기차, 스스로 주행하는 자율주행 차량, 통신과 연결되어 주변과 소통하는 일종의 사물인터넷(IoT) 장치를 말하는 커넥티드 카와 같이 많은 정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 의미가 다른 정의지만, 실제 제조사들은 이러한 정의를 모두 합친 차세대 자동차 개발을 목표하고 있으며, 각 기술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자율 주행의 오류를 줄이고, 사고에서 멀어지게 하려면 주변 차량이나 신호등과 같은 사물, 나아가서는 도로와 직접 연결해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율주행 차량이자 커넥티드 카로 통합하는 과정에 놓인 거죠.
결국, 자동차 제조사들은 각 기술을 통합하면서 개인화 욕구까지 충족해야 하는 경쟁에 놓였습니다. 자동차를 설계하고, 생산하는 근본부터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스케이트보드 플랫폼(Skateboard Platform)’ 개발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2002년, 제너럴 모터스(GM)는 하이 와이어(Hy-wire)라는 콘셉트카를 선보였습니다. 수소 연료 전지를 사용하는 자동차로 구동 시스템을 모두 스케이트보드를 닮은 모듈에 내장함으로써 엔진 블록이나 트랜스미션 시스템을 제거해 설계자가 원하는 차체만 얹으면 차량 구획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는 개념이었습니다.
차체만 변경하면 세단형 자동차나 미니 벤, 트럭, 버스까지 하나의 모듈 위에서 구성할 수 있다는 게 GM의 설명이었죠. GM은 하이 와이어가 2010년이면 상용화될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수소 연료 전지를 상용화하는 것부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잊힌 개념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이 와이어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건 전기차의 대중화 이후입니다. 특히 테슬라의 전기차는 차량 하부에 배터리를 이어 붙여 평평한 바닥을 만들고, 전기 모터와 바퀴를 배치한 스케이트보드 형태 위에 차체를 올리는 방식입니다. 모듈화가 이뤄진 건 아니라서 플랫폼으로 정의하기에는 부족했지만, 하이 와이어를 다시 떠올리게 했고, 전기차 기반의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실현할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의 가장 큰 장점은 같은 플랫폼 위에 차체만 변경해 다양한 모델을 생산하더라도 높은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BMW에서 CFO를 지낸 스테판 크라우스(Stefan Krause), BMW에서 제품 개발 책임자를 지낸 울리히 크란츠(Ulrich Kranz), BMW i3와 i8의 디자인 작업을 수행한 리처드 김(Richard Kim)은 혁신적인 전기차를 생산한다는 목표로 2017년 이벨로즈시티(Evelozcity)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작년, ‘카누(Canoo)’로 사명을 변경한 이 회사는 개발하는 모든 차량이 같은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공유합니다. 현재까지 외형 디자인이 공개된 건 미니버스 형태뿐이지만, 라이프스타일, 라이드 헤일링, 배달, 통근 등 여러 모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통근 차량은 업무를 볼 수 있는 테이블을 놓고, 식료품 배달 차량은 냉장 설비를 추가하는 식으로 목적에 따라서 공간의 넓이와 내부 구성을 변경하는 겁니다. 기반이 되는 스케이트보드 플랫폼만 변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이미 생산한 플랫폼을 유지한 채 차체와 내부 구성만 변경하면 차량의 용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카누는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의 높은 생산 효율성을 최대로 활용하고자 개인 소비자용 차량은 구독 모델로 서비스할 계획입니다. 소비자는 일정 비용을 내면 2개월의 시험 기간 자동차를 타볼 수 있습니다. 만족할 때만 1개월부터 10년 사이 기간을 설정해 자동차를 구독하면 됩니다. 소비자가 만족하지 못해 돌아온 차량은 플랫폼만 정비하면 다시 다른 소비자에게 보내거나 다른 용도로 판매할 수 있어서 구독 모델을 유지하는 비용을 줄이고, 고객 만족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장점은 자동차를 구성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걸 하나의 모듈로 합쳤기에 표준화가 수월하다는 겁니다.
최근 GM은 얼티움 배터리(Ultium Battery)와 모듈식 플랫폼을 공개했습니다.
하이 와이어나 스케이트보드라고 소개하진 않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따릅니다. 얼티움 배터리는 파우치형 배터리입니다. 배터리 팩 내부에 파우치형 셀을 세로나 가로로 쌓을 수 있어서 엔지니어들은 설계에 따라 다양한 레이아웃을 짤 수 있습니다. 블록을 조립하듯 짜 맞춘 배터리와 추진 시스템으로 스케이트보드를 만들고, 위에 차체를 올리면 자동차가 됩니다.
카누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몇 가지 자동차를 만들고자 합니다. GM은 얼티움 배터리로 플랫폼을 더 잘게 쪼개서 모듈화를 통한 레이아웃 구성 범위를 넓혔습니다. 카누의 플랫폼은 미니버스 정도만 만들 수 있지만, GM은 얼티움 배터리를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서 대형버스나 세미트럭도 구성할 수 있습니다. 플랫폼이 지닌 특성에 의해 같은 시스템으로 생산을 표준화하고, 다양한 자동차를 높은 효율성으로 생산하는 체제를 만든 것입니다. GM은 올해부터 출시하는 전기차에 얼티움 배터리와 모듈식 플랫폼을 채용할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자동차 업계가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 생산 효율성과 표준화라는 장점이 있지만,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이끌 정도의 요소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시장에서 선도적 위치를 점하기 위한 더 깊은 이점이 있다는 것이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눈여겨보는 이유입니다.
이제 전기차의 발전과 함께 실현할 수 있게 된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은 자율 주행과 커넥티드 개념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율 주행 시스템을 플랫폼에 통합하면 자율 주행이 가능한 세단, 픽업트럭, 미니버스 등 여러 모델을 목적에 맞게끔 시간을 단축해 생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는 자동차끼리 주행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안정적인 자율 주행을 제공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런 개념이 더 확장해서 주변 사물이나 도로 등 연결하는 범위가 넓어진다면 모든 자동차에 적용할 방안을 찾아야 하고, 범용 규격을 마련할 필요성이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은 그 특성상 플랫폼은 같으나 다양한 차체와 목적의 자동차를 높은 효율로 생산할 수 있습니다. 즉, 스케이트보드 플랫폼 개발사가 범용 규격의 플랫폼을 자동차 제조사에 제공하고, 제조사는 플랫폼을 자사 자동차에 맞게 개조하는 방식으로 자동차 생산이 바뀔 수 있습니다.
2009년 설립된 전기차 스타트업인 리비안(Rivian)이 좋은 사례입니다.
리비안은 쿼드 모터, 독립 에어 서스펜션, 지능형 배터리 관리 시스템, 유압식 롤 제어 시스템, 열 시스템 등을 통합한 하나의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으로 전기 픽업트럭과 전기 SUV(Sports Utility Vehicle)를 개발합니다.
레벨 3의 자율 주행 기능도 포함하고 있는데, 회사는 완전 자율 주행을 목표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실현된다면 리비안이 생산하는 모든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은 완전 자율 주행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리비안의 사례가 중요한 건 주문에 따라서 다른 기업의 자동차 개발에도 관여한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4월, 포드는 리비안에 5억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11월, ‘리비안 플랫폼을 활용한 링컨 브랜드의 전기 SUV를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르면 2022년 선보일 계획이며, SUV 이후 픽업트럭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리비안 플랫폼을 가져와서 링컨 브랜드의 차제를 씌우고 개조한 자동차를 시장에 내놓겠다는 겁니다.
그보다 앞선 2월에는 아마존이 리비안에 7억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이후 아마존은 리비안에 리비안 플랫폼을 활용한 10만 대의 전기 벤을 2024년까지 생산할 걸 주문합니다. 올해 시제품을 선보이고, 내년에 처음 출시할 계획입니다.
기반인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은 포드에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아마존은 일반 소비자 시장이 아닌 물류 배송 직원을 위한 차량을 원하므로 직원들이 차량 내에서 업무를 보기 좋은 구조로 설계하고, 직원의 식사를 보관할 냉장고를 탑재하는 등 목적에 걸맞도록 개발하고 있습니다.
만약 리비안의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이 범용 규격으로서 전기차 시장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다면 어떨까요? 커넥티드 카의 연결을 위한 통신 규격, 스마트시티 계획에 따른 컨소시엄과 표준화에서 막강한 권한을 지닐 수 있고, 여타 자동차 제조사들은 리비안의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기반으로 자동차를 개발해야 하겠죠. 모든 제조사는 아니더라도 권한을 가지고, 시장을 주도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가령 스마트시티 계획에 디지털화한 체계적인 교통 환경을 구축하려는 도시가 있다면,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대중교통이나 택시, 도시 내 배달 및 택배 차량 등 많은 부분에서 충전 규격, 자율 주행 시스템, 커넥티드 카 시스템, 주행 데이터 수집 등 모든 요소를 플랫폼에 통합합니다. 그리고 참여하려는 제조사를 대상으로 사업자를 선정해 해당 플랫폼만 기반이라면 어떤 형태의 자동차라도 개발할 수 있도록 허가할 수 있을 겁니다.
다양한 차종이 스마트시티에서 얽히더라도 플랫폼은 하나이므로 수월하게 시스템 단일화가 가능해집니다.
포드가 리비안에 투자한 건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공급받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포드는 자율 주행 시스템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8년 포드는 자율 주행 자회사를 설립했고,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아르고(Argo)의 지분을 인수해 자율 주행 플랫폼을 개발합니다.
작년에는 폭스바겐과 함께 50 대 50의 합작 투자사를 설립해 아르고에 70억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아르고의 자율 주행 기술을 폭스바겐도 활용할 수 있다는 거죠. 이처럼 포드는 자사가 주도하는 자율 주행 기술을 플랫폼으로써 경쟁 자동차 회사들도 이용하길 원합니다.
리비안도 자체적인 자율 주행 연구를 하고 있지만, 포드가 선도적인 포지셔닝을 마련하고, 자율 주행 규격을 이끌면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에 포드의 자율 주행 기준을 삽입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포드로서는 리비안의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으로 원하는 모든 제조사에 자사 자율 주행 플랫폼을 제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겠죠. 리비안으로부터 전기 벤을 공급하려는 아마존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포드가 리비안에 투자한 이유입니다.
아마존이 리비안에 투자한 맥락도 같습니다. 아마존은 전기 벤 개발에 협력하면서 자사 AI 플랫폼인 알렉사(Alexa)를 대시보드에 탑재했습니다. 자동 비상 제동, 차선 유지 보조, 보행자 경고 시스템, 교통 표지판 인식, 항법 시스템을 통합해 운전자는 주행에 대한 피드백을 알렉사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 알렉사는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에 포함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에 포함한 다양한 디지털 시스템에 대해서 운전자가 접근할 인터페이스와 사용자 경험이 필요할 테고, 아마존의 전기 벤이 알렉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얘기는 달라질 겁니다.
수년 전부터 아마존은 알렉사를 자동차 제조사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각 자동차의 시스템이나 형태,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요소를 알렉사와 긴밀하게 연결하긴 어렵고, 자동차마다 특성이 생겨서 단일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탓으로 대시보드의 핸즈프리 음성 인터페이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그러나 스케이트보드 플랫폼과 알렉사를 통합하게 되면 차량을 제어하는 모든 부분에 알렉사가 관여하고, 나아가서는 자동차의 주변 차량이나 사물과의 소통을 인간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동차 제조사가 알렉사를 통합한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선택하기만 한다면 말이죠.
이렇듯 업계는 자동차에 포함하려는 여러 정의를 단일화, 표준화, 규격화해 통합할 수 있는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게임 체인저로서 주목하는 겁니다.
스케이트보드 플랫폼을 채용한 전기차는 올해부터 많이 등장할 거로 예상합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로서 전기차의 효율적인 양산을 실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플랫폼으로서 가치가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면 차세대 자동차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요소가 하나의 플랫폼에 담길 거로 전망합니다.
글 l 맥갤러리 l IT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