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LG CNS 기술블로그 DX Lounge에서 최신 IT 소식을 만나보세요!

IT Trend

컴퓨팅의 미래를 보여준 더글러스 엥겔바트

2016.03.21

트랜지스터, 집적 회로, 메모리 장치 등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면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컴퓨터 하드웨어의 기본 구조가 급격히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발전된 기술을 이용하고 활용하는 방법, 특히 인간과 컴퓨터 인터페이스 간의 협업 작업 및 공유의 개념은 상당히 뒤처져 있었죠. 더글러스 엥겔바트와 그가 이끈 스탠퍼드 연구소(Stanford Research Institute)의 소규모 연구팀은 끈질긴 연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컴퓨팅의 여러가지 측면에 대한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더글러스 칼 엥겔바트(Douglas Carl Engelbart)는 1925년 1월 30일에 미국 오리건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포틀랜드 시 교외의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엥겔바트는 1955년 군복무를 위해 입대하기 전까지 오리건 코발리스 주립 대학(Oregon State College at Corvallis)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레이더 기술에 매료되어 미 해군 전자 기술 훈련 프로그램(Electronics Training Program)에 들어가 1945년에 무선 통신 기술병 2등 상사로 졸업합니다. 그 후 태평양 전쟁 종전일(대일 전승 기념일)인 1945년 8월 15일에 필리핀에서 레이더 기술병 신분으로 현역 복무를 마칩니다.

더글러스 엥겔바트는 1995년에 바이트 매거진(Byte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저는 디지털 기술이 복잡하고 긴급한 문제를 처리하는 인간의 집단적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컴퓨터, 고속 통신, 디스플레이, 인터페이스 등 기술 덕분에 진화론적인 의미에서 갑자기 인간은 신경계를 완전히 새롭게 업그레이드하고 있는 셈이죠.”

정보 검색 시스템 메멕스

군에 복무하는 동안 엥겔바트는 자신의 생각과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는 물리학자 베너바 부시(Vannevar Bush)의 기고문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As We May Think)가 수록된 라이프 매거진(Life Magazine)’ 최신호를 발견합니다. 기고문에서 부시는 자신이 메멕스(Memex, “memory”와 “index”의 합성어)라는 이름을 붙인 가상의 일반 정보 검색 시스템을 설명했습니다.

부시는 메멕스를 책상 모양의 전기기계 장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장치는 개인의 모든 책, 서류, 문서 등을 저장할 수 있고, 그것들의 연계를 통해 서로 다른 정보 사이에 링크와 트레일을 생성할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링크와 트레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소환되어지고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시는 여러 가지 점에서 메멕스가 조사 작업을 수행할 때는 인간의 두뇌처럼 작동하면서 정보를 영원히 저장할 수 있는 추가적인 장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훨씬 빠른 속도와 우수한 유연성을 지닌 메멕스는 인간의 기억력을 확장 보완한 친숙한 시스템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베너바 부시가 고안한 메멕스의 모양을 추정한 그림. 장치의 정보를 모두 마이크로필름에 저장해야 한다는 것이 부시의 생각이었지만, 그의 정보 연결 개념은 하이퍼미디어 개발자 테드 넬슨(Ted Nelson)과 인터넷의 주요 제안자 J.C.R. 리크라이더(J.C.R. Licklider) 등을 비롯한 많은 컴퓨터 선구자들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emex.jpg)

양방향 협업 증대를 위한 컴퓨팅 개발

엥겔바트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1948년에 오레곤에서 전기공학 학사 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부시의 개념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같은 해에 그는 NACA 에임스 연구실(미 항공 우주국 NASA의 전신)의 전기 기사로 일하던 어느 날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다양한 입력 장치를 지닌 컴퓨터로 조작할 수 있는 여러 기호와 정보로 가득한 거대한 CRT1 화면의 시각적 이미지가 갑자기 마음 속에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죠. 이에 따르면, 사용자들은 탁월한 유연성과 속도를 이용해 정보 공간을 돌아다니며 아이디어와 솔루션을 구성하고 조직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용자들이 연결된 상태에서 정보 공간은 사용자들 사이에서 잠재적으로 합쳐지거나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엥겔바트는 2004년에 와이어드 지(Wired magazine)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대략 30분 만에 빠르게 전개되었고, 갑자기 양방향의 협업적인 컴퓨팅 가능성이 확실해졌죠.”

에임스 연구실에서 컴퓨팅 개발에 제약이 따르자, 엥겔바트는 버클리 대학교에서 1955년에 전기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스탠퍼드 연구소에 합류합니다. 스탠퍼드 연구소에서 멀티플 세팅 자기 코어와 메모리 방전 장치를 비롯한 수많은 하드웨어 설계 관련 특허를 획득하는 한편, 컴퓨터를 이용한 협업 증대라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했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의 논문인 ‘인간 지성의 증대: 개념적 틀(Augmenting Human Intellect: A Conceptual Framework)’에 요약되었습니다. 이 논문에서 엥겔바트는 “인간 지성의 증대란 복잡한 문제 상황에 접근하고, 특정 요구를 충족하는 지식을 획득하며, 문제의 해결책을 이끌어내는 인간 능력의 강화를 의미한다.”고했습니다.

이 논문은 엥겔바트가 스탠퍼드 연구소 내에 자신의 연구소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소에 증대연구센터(Augmentation Research Center, 이하 ARC)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곳에서 수석 하드웨어 엔지니어인 빌 잉글리시(Bill English)를 비롯한 그의 팀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획기적인 지식 발전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직관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지식과 아이디어를 저장•표시하는 작업을 기계가 수행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커서 제어 시스템 ‘마우스’ 개발

ARC 팀의 첫 번째 성과는 화면 주위에서 옮기고 드래그할 수 있는 커서 제어 시스템의 개발입니다. 엥겔바트와 그의 팀은 oNLine System(NLS)에서 이 시스템을 개발하여 사용자들이 화면상의 요소를 가리키고, 그것을 복사•변경•이동 및 붙여넣기 할 수 있는 최초의 컴퓨터 인터페이스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개발 초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레이더 화면과 함께 이용하는 라이트펜이 최적의 입력 도구라고 생각했지만 엥겔바트는 확신하지 못했고, 그의 팀은 가능성 있는 다양한 입력 및 제어 장치를 실험했습니다. 예를 들어 워크스테이션 데스크 밑에서 사용자의 무릎으로 작동하는 트랙볼•피아노 코드를 연주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5개의 막대를 다양한 순열로 누르는 코드 키보드 등 입니다.

또한 위치 기록 장치로서 버튼과 금속 바퀴가 서로 직각을 이루고 있는 나무 박스를 고안했는데요. 이 장치는 작동 중 실수를 최소화할 뿐 아니라 속도 및 사용 편의성 측면에서도 다른 경쟁 장치들보다 우수한 제어 시스템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디스플레이 시스템용 X-Y 위치 표시기”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런 장치를 ‘컴퓨터 마우스’라고 부릅니다.

ARC가 개발한 최초의 마우스. ARC 팀은 이 장치에 버튼 5개를 장착해 실험하다가 이후에 플라스틱 성형 모델에는 버튼 3개를 장착합니다. 1972년에 현재의 Xerox PARC에서 빌 잉글리시가 금속 바퀴를 굴러가는 볼로 대체하면서 모든 방향의 움직임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최초의 볼 마우스를 개발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RI_Computer_Mouse.jpg)

이 마우스는 대중에게 엥겔바트의 현대 컴퓨팅에 대한 공헌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엥겔바트와 ARC는 이 마우스를 돈벌이에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이 마우스는 자신이 구상한 NLS(oNLine System)을 위한 간단한 제어 장치 이상의 의미는 없었기 때문이죠.

ARC 팀은 1960년대에 줄곧 NLS를 연구하면서 커서 입력을 NLS에 결합하고, 워드 프로세싱을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미디어로 불리기 전의 연결된 정보 및 파일 내 개체 주소 지정을 적용하였는데요. NLS의 거의 모든 요소에 주소 지정을 가능하게 만들어 다른 요소들에 연결했습니다. 이와 함께 NLS는 교차 파일 편집, 화면에 여러 개의 창 표시 등이 가능했으며, 최대 16개의 연결 워크스테이션을 지원했습니다.

엥겔바트의 팀은 꾸준히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들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상당수의 다른 컴퓨터 과학자들은 엥겔바트에 무관심하거나 그를 의심하거나 비웃었습니다. 또한 일부 컴퓨터 과학자들은 NLS가 개척했다고 주장한 기술이나 혁신이 실제로 구현되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협업 컴퓨팅의 개발

엥겔바트는 이런 부당한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1968년 가을 샌프란시스코 공동 컴퓨터 회의(1968 Fall Joint Computer Conference in San Francisco)에서 긴 발표 시간을 잡았습니다.

1,000여명의 컴퓨터 산업 학자 및 전문가 앞에서 엥겔바트와 그의 팀은 7미터 높이의 스크린에 자신들이 개발한 모든 기술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스크린은 엥겔바트 뒤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카메라 1대는 그의 얼굴을, 또 다른 1대는 코드 키세트와 마우스(이때 최초로 대중에게 선보임), 키보드가 포함된 양방향 제어 패널을 작동하는 그의 두 손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발표를 통해 엥겔바트는 하이퍼미디어, 다중 창에서의 디지털 텍스트 편집, 인스턴트 메시징의 프로토타입, 2곳의 다른 위치간 공유 화면상에서의 협업 네트워킹 등을 보여주었습니다. 연단의 엥겔바트와 그곳에서 약 60km 떨어진 스탠퍼드의 ARC에 있는 빌 펙스턴(Bill Paxton), 제프 루립슨(Jeff Rulifson) 등 그의 팀원들이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 회상 회의를 구현하기도 했습니다.

1968년에 NLS를 발표하고 있는 엥겔바트. 거대한 스크린은 여러 개의 창으로 분할해 표시했고, 발표하는 엥겔바트, 그와 함께 화상 회의를 진행하는 동료들, 그리고 컴퓨터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처리되는 문서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other_of_All_Demos_-_Douglas_Engelbart,_1968.jpg)

참석자들은 이 모든 내용에 귀를 기울였고, 엥겔바트가 약100분 간에 걸친 광범위한 발표를 마무리하자 청중은 그와 그의 팀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미래 컴퓨터의 환상적 세계”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San Francisco Chronicle)의 헤드라인이 되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기술 예측가인 폴 사포(Paul Saffo)는 이 발표를 “컴퓨팅 산업의 지각 변동…… 더글러스 엥겔바트는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는 사상가”로 평가했습니다.

특히 미국 고등연구계획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ARPA)의 정보처리기술 국장인 로버트 테일러(Robert Taylor)는 매우 만족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가 단순한 계산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컴퓨터에 대해 완전히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엥겔바트는 협업 컴퓨팅에 대한 아이디어 개발 작업을 계속 진행했고, NLS는 지속적으로 발전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엥겔바트는 연구를 계속하여 ARPANET을 이용해 전문가 지식 기반을 구축했으며, 1989년에는 딸 크리스티나와 함께 Bootstrap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컴퓨팅의 미래를 보여주다.

월드 와이드 웹부터 Wikis에서 볼 수 있는 온라인 협업 편집에 이르기까지 현대 컴퓨팅의 다양한 요소에 영감을 제공한 엥겔바트의 연구가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그는 후년에 가서 더욱 커다란 찬사를 받았습니다.

엥겔바트는 1997년에 상금 50만 달러의 Lemelson-MIT상을 수상했고, 2000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기술 분야의 성과를 기리는 미국 최고의 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혁신메달(National Medal of Technology)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2011년에는 IEEE 인텔리전트 시스템의 인공지능 명예의 전당(IEEE Intelligent Systems’ AI Hall Of Fame)에 입성했고, 예일 대학교에서 최초로 공학 및 기술 박사가 되는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연구 정신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이렇듯 편리하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는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뛰어난 업적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엥겔바트는 인터넷으로 발전한 초기 ARPANET 컴퓨터 네트워크를 지원한 자신의 역할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2004년에 와이어드 지(Wired magazine)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UCLA 다음으로 두 번째 네트워크 허브였습니다. 그보다 인터넷의 시작에 가까울 수는 없었죠.”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ouglas_Engelbart_in_2008.jpg)

[‘A Smart, Creative World: Past and Future’ 연재 현황]

(1) 컴퓨터의 탄생, 시대를 앞서간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http://blog.lgcns.com/950

(2)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
http://blog.lgcns.com/982

(3) ENIAC: 세계 최초의 빠른 컴퓨터
http://blog.lgcns.com/1001

(4) 디버깅의 신화,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
http://blog.lgcns.com/1021

(5) 초기 컴퓨터의 진화
http://blog.lgcns.com/1042

(6) 컴퓨팅의 미래를 보여준 더글러스 엥겔바트
http://blog.lgcns.com/1060

(7) 웹의 발명: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
http://blog.lgcns.com/1165

(8) 인터넷의 탄생
http://blog.lgcns.com/1171

(9) 위키의 탄생
http://blog.lgcns.com/1175

(10) 로봇의 발전
http://blog.lgcns.com/1182

글 ㅣ클라이브 기포드 (Clive Gifford)

● 관련 자료
1945년에 애틀랜틱 매거진에 발표된 베너바 부시의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As We May Think)’ 온라인판.http://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1945/07/as-we-may-think/303881/
엥겔바트의 1962년 세미나 논문 ‘인간 지성의 증대: 개념적 틀(Augmenting Human Intellect: A Conceptual Framework) 전문.http://www.dougengelbart.org/pubs/augment-3906.html
1968년에 더글러스 엥겔바트와 그의 팀이 수행한 ‘모든 발표의 어머니(Mother Of All Demos)’의 전체 비디오 스트림(100분).http://web.stanford.edu/dept/SUL/library/extra4/sloan/mousesite/1968Demo.html#complete
뉴욕 타임스의 존 마르코프(John Markoff)가 컴퓨터 역사 박물관을 위해 실시한 더글러스 엥겔바트의 70분 인터뷰를 참조할 것.https://www.youtube.com/v/VeSgaJt27PM?version=3&start=2&autoplay=1
브라운 대학교의 Memex와 Beyond 웹페이지는 하이퍼텍스트와 링크 멀티비디어 정보의 초기 발전에 대해 서술한다.http://cs.brown.edu/memex/

  • CRT (Cathode Ray Tube)는 음극 선관을 말하며 일명 브라운관이라고도 한다. 전기신호를 전자빔의 작용에 의해 영상이나 도형, 문자 등의 광학적인 영상으로 변환하여 표시하는 특수 진공관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본문으로]

챗봇과 대화를 할 수 있어요